21st Sunday after Pentecost/Proper 25A (레위기 19.1-2, 15-18; 성시 1; 1 데살 2.1-8; 마태 22.34-46)6/27/2018 “너나 잘 하세요.” 영화 <친절한 금자씨>에 나오는 대사입니다. 아마 이 영화 보신 분들이 많을 거라 생각합니다. 출소 후 감옥에서 만나 전도사가 두부를 들고 기다립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하죠. “두부처럼 하얗게 살라고 다시는 죄 짓지 말란 뜻으로 먹는 겁니다.” 금자씨는 두부가 놓인 접시를 전도사의 손에서 살짝 밀쳐내고 두부는 땅에 떨어집니다. 그리고 무표정으로 말합니다. “너나 잘 하세요.”
“너나 잘 하세요.” 재밌는 표현이긴 하지만 가르치는 입장에 있는 사람에게는 꽤나 잔인한 말입니다. 담배 피는 고등학생 아이에게 금연을 요구하는 아버지, 아버지 입장에선 아이를 위한다고 말했지만, “아버지도 안끊으면서 저보고 끊으라는 겁니까?”라는 답변이 돌아온다면 뒷목 잡을 일이겠죠. 아무리 공손하게 표현해도 결국 “너나 잘 하라”는 뜻입니다. 금자씨가 두부를 떨어트리며 한 이 말, “너나 잘 하세요.”는 언행일치의 중요성을 코믹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내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삶, 그리스도인에겐 신앙과 행동이 함께 하는 삶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서는 그리스도인에게 가장 중요하고 제일 지키기 어려운 가르침을 이야기합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며 주님이신 너희 하느님을 사랑하여라.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여라.”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목적이 오늘 복음서 말씀에서 다 들어있습니다. 하느님을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해 사랑하라. 이웃을 네 자신처럼 사랑하라. 이 가르침을 굉장히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제 가족 누군가에게 하면 아마 금자씨처럼 “너나 잘 하세요.”라고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제 1 독서 레위기에서도 같은 가르침이 나옵니다. 특히 타인을 내 몸처럼 사랑하라는 가르침이 대두됩니다. 영어 성서에는 “Love your neighbor as yourself.”라고 복음서의 가르침과 똑같이 번역이 되어 있는데 공동번역 성서는 좀 다르게 해석을 했습니다.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아껴라.” 어떤 게 바람직한 번역이다를 논하기 전에 “아끼다”는 표현이 더 살갑게 들립니다. 이 번역으로 복음서의 가르침을 표현하자면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해 하느님을 아껴라.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아껴라.”로 할 수 있는데 어떻게 들리세요? 좀 더 구체적이고 친근하지 않나요? 사랑하면 아끼게 되죠. 레위기와 복음서가 보여주는 공통점은 하느님과 이웃 사랑에 대한 가르침 이외에 한가지 더 있습니다. 레위기에서 이웃을 아끼라는 가르침이 주어진 뒤에 반복되는 하느님의 선포가 있습니다. “나는 야훼이다.” 복음서도 비슷한 패턴을 취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라는 가르침 뒤 예수께서 바리사이파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정체성에 대해 여쭤보십니다. 이들은 그리스도는 다윗의 자손이라고 답하는데 예수께서 그리스도는 주님, 하느님이시라고 가르치십니다. 여기서 예수께서는 본인의 정체성, 즉 예루살렘에 입성했을 때 민중들이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라고 부른 정체성을 정정하십니다. 즉, 바리사이파 사람들에게 “나는 하느님이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패턴, 사랑하라, 아끼라는 가르침 뒤에 “나는 하느님이다.”라고 이어지는 패턴 앞에서 “너나 잘 하세요.”라는 반격은 무용지물입니다. 예수께서 우리에게 “사랑하라”고 말씀하시면 우리가 “예수님, 당신이나 잘 하세요.”라고 할 수 없지 않습니까? 하느님께서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해 당신 자신처럼 인간을 사랑하심은 예수의 삶과 죽음, 부활에서 드러납니다. 예수께서 사랑하라 말씀하셨고 온몸으로 사랑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분부하신 가르침, 하느님을 이웃을 온맘 다해 아끼라는 이 가르침 앞에 우리는 금자씨처럼 답할 수 없습니다. 그저 침묵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는 절대 불가능한 일을 우리에게 시키신 걸까요? 그건 아닙니다. 인간이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에 끝도 완성도 없습니다. 그 깊이를 더해가는 길 밖에 없습니다. 더 깊게 넓게 사랑하는 법을 일생을 통해 배워가는 겁니다. 사실 이 사랑하라는 가르침에서 우리가 사랑하는 대상을 둘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한명 더 있습니다. 바로 나 자신입니다.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하고 내 몸처럼 나 자신처럼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기 위한 가장 첫 걸음은 내가 나를 사랑하는데 있습니다. 나를 온전히 사랑하지 않고 이웃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얼마나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계신가요? 혹은 얼마나 자기 자신을 질책하시나요? 저는 병원에서 일주일에 세번씩 정신질환을 가지고 있는 환자들과 하는 영성그룹은 인도합니다. 보통 그룹 시작하기 전에 모임의 목적과 규칙 등을 설명합니다. 특히나 규칙은 상당히 중요해서 초반에 이야기를 하지 않으면 그 그룹은 어수선해지기 쉽상입니다. 규칙이란 게 별게 없습니다. 누군가 이야기할 때 경청하고 가치 판단하지 말 것 등등 입니다. 여기서 제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규칙이 있습니다. 뭘까요? 바로 이 그룹에서는 절대 공격하지 않는다는 규칙입니다. 이 말을 하면 환자들이 내심 불안해 하는 기색을 보입니다. 마치 이 그룹에서 종교 논쟁이나 자신의 신념에 어긋나는 이야기를 하는 건가 싶은 거겠죠. 환자들이 좀 의아해 하는 찰나에 한마디 덧붙입니다. “절대로 자신을 공격하지 마세요.” 공격을 하지 말라는 이야기에 나 아닌 다른 사람만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얼마나 무의식적으로 우리가 우리 자신을 공격하고 사는지 곰곰히 생각해 볼 일 입니다. 내가 아닌 타인을 바라볼 때 알 수 있습니다. 나를 상대방과 비교시켜서 나를 폄하시키는 일, 다들 해보셨죠? 아무개가 나보다 더 잘 낫다, 이쁘다, 잘 생겼다, 잘 번다, 잘 나간다, 좋은 차를 탄다, 좋은 구두/가방을 든다, 더 좋은 동네, 더 좋은 학벌을 가졌다 등등. 여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흙수저와 금수저, 갑과 을, 이 표현들은 사회적으로 우리 사회가 인간의 가치를 물질로 측정하는지 보여줍니다. 반면, 우리 내면 안에서 일어나는 다른 공격의 양태도 있습니다. 나를 상대방과 비교해 끊임없이 비하시키는 게 아니라 내가 더 잘났다고 하는 모습입니다. 요즘 White Supremacy, 백인 우월주의라는 말이 작년 2016년 11월부터 너무나 빈번히 미디어에 오르내리고 있습니다. 우월주의가 뭡니까? 단순히 내가 중요한 사람이라고 믿는 게 아니라 내가 나보다 더 중요하고 우월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게 우월주의입니다. 내 피부가 하얗기 때문에, 내가 돈을 더 벌기 때문에, 내가 남자라서, 내가 이성애자라서, 내가 젊어서 등등 여러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세상은 이런 이유들을 정당화 시키려 합니다. 이 두 가지의 모습, 우리 안에 있습니다. 내 안에 존재하는 이 두 가지 모습을 우리가 직접 대면하지 못하면 우리는 우리 자신을 결코 올바르게 하느님의 뜻대로 사랑할 수 없습니다. 어떻게 바라볼 수 있을까요? 바로 우리 주위 이웃을 통해서 두 가지 모습을 지닌 나를 볼 수 있습니다. 인간은 사회적, 관계적 존재입니다. 타인과의 관계를 통해 내가 확인됩니다. 묵상을 통해서도 가능한데, 이 행위 또한 절대타자인 하느님과의 관계를 통해 내가 확인되는 겁니다. 타인을 통해 나 자신을 비하시키고 때론 우쭐되는 나를 바라본다… 좀 추상적이죠? 제 개인적인 경험을 들려드리겠습니다. 제 허물을 드러내는 것이라 좀 부끄럽긴 하지만, 하늘뜻/뉴욕한인성공회 신자들 어느 누구도 제게 “너나 잘 하세요”라고 안하실 거라 믿기에 제 경험을 나누겠습니다. 어느날 출근 길에 거리에 서 있는 중남미 출신으로 보이는 청년이 보였습니다. 문득 내가 저 청년보다 더 낫다고 생각하는 제 자신을 발견했습니다. 어떻게 발견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성령께서 제 마음의 눈을 열으셨다고 믿습니다. 나보다 체구도 작고, 교육 또한 내가 더 많이 받았을테고, 직장도 내가 더 안정적일 게 분명했습니다. 이렇게 내가 더 우월할 만한 사항들을 떠올리며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고작 이런 것들, 이따위것들로 내가 저 청년보다 낫다고 하다니…참 못나다.”란 생각 말입니다. 주님 앞에 부끄러웠습니다. 하지만 또 감사했습니다. 우연히 본 중남미 청년이 내 안에 존재하는 쓰레기를 볼 수 있게 내 눈을 뜨게 해준 듯 했습니다. 이 경험은 저 자신을 비하하고 공격하는 제 또다른 부분을 정화시켰습니다. 나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누군가를 만났을 때, 작아지는 제 모습을 보면서 이 또한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인지 정신이 들더군요. 고작 그런 것들로 나 자신을 비하하다니..란 생각 말입니다. 그렇다고 내가 더 우월한 것들을 생각해내려고 한 건 아닙니다. 그저 하느님 앞에 잘난 것, 못난 것 없이 다 사랑받는 존재인데 나 자신을 사랑하지 못해온 것에 대한 회개의 마음이 들었습니다. 제가 존경하는 한 목사님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우리 안으로 깊이 들어간 영적 여정만큼만 이웃을 섬길 수 있다.” 우리 안으로 깊이 들어간 영적 여정이란 얼마나 우리가 깊이 우리 자신을 이해하고 아끼며 사랑하는지 묻고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를 사랑하는 만큼 이웃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류시화 시인이 이런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미국의 코칭 지도자 케빈 홀은 여행 중에 우연히 만난 한 인도인으로부터 '겐샤이'라는 단어를 배운다. 고대 산스크리트어인 '겐샤이'는 '누군가를 대할 때 그가 스스로를 작고 하찮은 존재로 느끼도록 대해선 안 된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 '누군가'에 해당하는 가장 중요한 사람은 자기 자신이다. 자기 자신을 대하는 방식은 타인을 대하는 방식에 그대로 반영된다.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타인을 사랑하는가?” (출처: facebook.com/poet.ryushiva/posts/431282203643538) “누군가를 대할 때 그가 스스로를 작고 하찮은 존재로 느끼도록 대해선 안 된다”라는 뜻을 지닌 단어 겐샤이, 우리 그리스도인은 타인 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을 작고 하찮은 존재로 느끼도록 놔둬서는 안됩니다. 또한 우리 그리스도인은 타인 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을 누군가보다 더 중요하고 우월한 존재로 느껴서도 안됩니다. 그저 하느님께서 우리를 당신의 자녀 삼으셨다라는 발판 위에 서야 합니다. 그저 하느님께서 우리를 죽기까지 사랑하셨다는 그 사실을 붙잡을 뿐 입니다. 하느님께서 나자렛 예수의 삶과 죽음과 부활을 통해 당신 자신 먼저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해 우리를 아끼고 사랑하셨습니다. 이제 성체를 모실 때, 우리는 다시금 주님의 사랑을 확인합니다. 자신의 몸과 피를 내어 사랑하신 그리스도가 내 안에 들어 오실 때, 우리의 몸과 피를 내어 우리 이웃을 사랑할 수 있는 능력 또한 우리에게 있음을 기억합시다. 오늘 데살로니카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나타난 성 바울로의 고백, “여러분을 극진히 생각하는 마음에서 하느님의 복음을 나누어줄 뿐만 아니라 우리의 목숨까지도 바칠 생각이었습니다. 우리는 그토록 여러분을 사랑했습니다.”고 말하는 성 바울로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 되길 빕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불안과 공포, 혐오를 내뿜는 세상 앞에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해 사랑하고, 또 “사랑하라” 외치고, 누군가 “너나 잘 하세요.”라고 빈정거리거든 “우리 같이 잘 해봐요.”라고 사랑으로 답하는 하늘뜻/뉴욕한인성공회 신자 여러분 되기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
Paul"...life up your love to that cloud [of unknowing]...let God draw your love up to that cloud...through the help of his grace, to forget every other thing." Archives
January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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