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선가 한번쯤 소위 “거듭났다"거나 “다시 태어났다" born again했다는 사람들의 간증을 들어본 적이 있으실거라 생각합니다. 각 간증의 내용은 거듭난 사람이 살아온 길에 따라 다릅니다. 그런데 이렇게 각자 다른 삶의 굴곡 가운데에도 공통분모가 있습니다. 모두 극심한 어려움 가운데 하느님을 경험했다는 점입니다. 부도가 났다든지 병을 얻었다든지 등등 시간이 지나가면 괜찮아질 정도의 고생이 아니라 인생의 바닥을 치게 하는 혹독한 고통을 겪는 와중에 하느님을 만납니다.
여기서 곰곰히 생각해 봐야 할 질문이 있습니다. 과연 하느님께서는 우리 고통 가운데에만 나타나시는 걸까요? 물론 그렇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고통 가운데에만 나타나시는 게 아니라 언제 어디서나 시공간을 초월해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고통은 빛이 보이지 않는 어두운 밤 아래 있는 나를 발견하는 경험과 비슷합니다. 밝은 대낮, 특히 정오엔 그림자가 생기지 않습니다. 빛으로 가득 차 있기에 빛이 보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칠흑같이 어둔 밤 아래 빛이 더 환하게 보이기 마련입니다. 우리가 경험하는 하느님도 이와 비슷합니다. 우리 삶에 아무 일이 없을 때 하느님이 잘 안보입니다. 어려운 일을 겪을 때 하느님의 함께 계심을 찾게 됩니다. 어두운 내 앞 길, 넘어지지 않으려고 한줄기 빛을 찾으려 온갖 신경을 쏟아 주위를 살피듯이 하느님의 흔적을 찾습니다. 하느님의 품을 느끼려 쉬지 않고 기도하며 영적 촉수를 뻗칩니다. 어려움에 대처하는 우리의 노력이나 신앙의 자세 물론 중요합니다. 하지만 이것보다 더 중요한 게 있습니다. 바로 하느님께서 쉬지않고 매순간 우리를 찾으신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찾는 것보다 우리를 매순간 찾으시는 하느님에게 사로잡혀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제1독서, 제2독서, 마태오가 전한 복음에서 우리를 찾으시는 하느님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제1독서의 말씀을 먼저 보겠습니다. 창세기 저자는 아브라함이 마므레의 상수리나무 곁에서 하느님 야훼께서 나타나셨다고 우리에게 전합니다. 그런데 정작 아브라함이 만난 건 자기를 향해 서 있는 세 명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 세 사람을 극진히 대접합니다. 물을 길어 발을 씻게 합니다. 아내인 사라에게 고운 밀가루 세 말을 내다가 반죽하여 떡을 만들라고 합니다. 살이 연하고 맛있어 보이는 송아지 한 마리를 잡습니다. 이 세 사람이 식사를 하는 동안 그들의 시중을 듭니다. 환대 혹은 접대(?)의 정수를 보여주는 아브라함에게 관심을 보일만도 한데, 이 세 사람은 그의 아내 사라가 어디 있는지 묻습니다. 그리고 내년 봄 사라가 아들을 낳을 것이라는 예언을 합니다. 이 세 사람을 통해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찾는 게 아니라 그의 아내 사라를 찾아옵니다. 사라는 이미 출산에 대한 희망을 포기한지 오래입니다. 아이를 가질 수 없는 아픔은 사라에게 큰 수치이자 고통이었습니다. 창세기 16장을 보면 사라가 아브라함에게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야훼께서 나에게 자식을 주지 않으시니 내 몸종을 받아 주십시오. 그 몸에서라도 아들을 얻어 대를 이었으면 합니다.” 사라의 몸종 하갈은 임신을 하자 사라를 업신여겼다고 합니다. 분함에 속이 터지겠죠. 사라는 하갈을 박대해 결국 임산부 하갈은 도망을 칩니다. 어떻게 보면 사라보다 하갈이 더 불쌍한 처지에 있습니다. 하갈 본인이 원해서 임신을 한 것도 아니고 모두 사라의 아이디어였는데 말입니다. 사라, 참으로 공사다망한 삶을 산 인물입니다. 임신한 여종을 박대하며 자신의 숨겨진 악한 본성을 경험했습니다. 그렇게 해도 아이를 가지지 못하는 아픔은 사라지지 않고 이제 태기가 끊긴 채 나이만 들었습니다. 세 사람이 내년 봄에 아이를 가질 것이라는 말에도 도인처럼 기대도 하지 않고 웃어 넘깁니다. “내가 이렇게 늙었고 내 남편도 다 늙었는데 이제 무슨 낙을 다시 보랴!” 고통을 넘어 고통을 받아들인 사라에게 하느님께서 찾아오십니다. 복음서를 볼까요? 예수님께서는 모든 도시와 마을을 두루 다니셨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자기에게 오라고 마냥 앉아서 기다린 게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회당에서는 가르치시고 복음을 선포하셨습니다. 그리고 병자와 허약한 사람들을 모두 고쳐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찾아간 사람들은 “하느님나라가 이미 도래했다"는 걸 모르는 사람들과 아픈 사람들이었습니다. 성 마태오는 이들을 “목자없는 양과 같이 시달리며 허덕이는 군중"이라고 보며, 예수님께서는 이들을 보시고 불쌍한 마음이 드셨다고 합니다. 바로 측은지심을 가지셨다는 겁니다. 바로 이들, 목자없이 시달리며 허덕이는 잃어버린 이들에게 열두제자를 보냅니다. 창세기에서 세 사람을 통해 사라를 찾으신 야훼 하느님처럼 예수님께서도 열두제자를 통해 잃어버린 이를 찾으십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잃어버렸다고 느낄 때, 우리가 칠흑같이 어두운 밤 아래 있을 때 우리를 찾으시는 하느님을 향해 눈을 감지 말아야 합니다. 성 바울로는 제2독서 로마서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우리는 고통을 당하면서도 기뻐합니다. 고통은 인내를 낳고 인내는 시련을 이겨내는 끈기를 낳고 그러한 끈기는 희망을 낳는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이 희망은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습니다. 우리가 받은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속에 하느님의 사랑을 부어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 죄 많은 사람들이 절망에 빠져 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때가 이르러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죽으셨습니다.” 고통을 당하면서도 기뻐할 수 있음은 나를 찾으시는 예수님을 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견디고 버티면서 희망이 솟아 오릅니다. 엄밀히 말해 모든 그리스도인은 예수님께 발견된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찾으신, 건져낸, 사로잡은 사람들이란 말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느님으로부터 잊혀지지 않은 사람입니다. 오늘 주보 앞면에 있는 그림을 보실까요? 안드레이 루블료프(Andrei Rublev)의 “삼위일체"라는 이콘입니다. 바로 제1독서 본문을 바탕으로 한 이콘입니다. 사라를 찾아온 세 사람이 삼위일체를 암시했다고 해서 이 이콘의 제목이 삼위일체로 붙여졌다고 합니다. 자세히 보시면 상수리나무가 뒤로 보이죠? 성작도 보입니다. 작아서 안보이시겠지만 이 세 사람의 시선 또한 앞을 바라보지 않고 있습니다. 가운데 앉아 있는 사람은 왼쪽에 있는 사람을 바라봅니다. 왼쪽에 있는 사람은 오른쪽에 있는 사람을 응시하고 다시 오른쪽에 있는 사람의 시선은 가운데 있는 사람을 향합니다. 어느 한 지점에서 시선이 멈춘게 아니라 둥글게 돕니다. 끊임없이 움직입니다. 이콘은 보통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읽는데 이 루블료프의 이콘에서 성부와 성령을 사람으로 그리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걸 전제하고 왼쪽 사람은 성부, 가운데는 성자, 오른쪽은 성령을 상징한다고 봅니다. 이 세 사람의 끊임없이 움직이는 시선은 마치 강강술래를 연상시키기도 합니다. 세 사람이 앉은 테이블에 가운데 사람의 마주편, 성작 앞의 자리가 비어있는데 바로 우리의 자리입니다. 여기서 사라가, 우리가, 특히 고통 가운데 있는 우리가 예수님께 발견됐다는 것, 예수님께서 우리를 찾으셨다는 것은 우리가 이 세 사람이 앉아 있는 테이블 빈 자리에 초대되었다는 뜻입니다. 혹은 신명나는 강강술래에 참여하도록 초대받았다는 뜻입니다. 단순히 이콘에서만 일어나는 초대가 아닙니다. 매주일 감사성찬례에 참여함은 바로 이 세 사람이 앉은 식탁에 앉아 함께 빵을 나누는 일입니다. 영성체 후 기도문을 볼까요? “전능하신 하느님, 주께서는 그리스도의 성체와 보혈로 신령한 양식으로 우리에게 먹이심으로써 그리스도의 몸과 하나되게 하셨으니 감사하나이다.” 이 기도는 주님의 식탁에 초대되었음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주님께 발견된 우리들, 주님의 식탁에 초대되어 함께 앉은 우리들...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통해 목자없이 시달리며 허덕이는 잃어버린 이들을 찾으셨듯이, 우리 또한 보내십니다. 우리도 잃어버린 이들을 찾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잃어버린 사람들을 찾아 나섭니다. 성공회신자들은 전도활동에 취약한 데요, 괜찮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잃어버린 사람들을 찾아 나서는 일은 예수천당 불신지옥이라는 슬로건으로 겁을 주거나 최신시설과 여러가지 혜택으로 사람들을 교회로 유혹하라는 게 아닙니다. 잃어버린 사람들에 대한 측은지심으로 그들과 함께 아파하고 기도하며 살아가는 게 바로 그들을 찾는 길입니다. 예수님께 발견된 우리들, 우리를 찾으시는 주님을 바라보는 우리들, 이런 우리를 통해 잃어버린 사람들, 고통 가운데 있는 사람들이 매순간 그들을 찾으시는 예수님을 경험하길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간구합니다. 아멘. |
Paul"...life up your love to that cloud [of unknowing]...let God draw your love up to that cloud...through the help of his grace, to forget every other thing." Archives
January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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